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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의 재災구성] 우리 손으로 만든 참극, 역대 최악의 사회적 재난 TOP5

2019.08.19

[순위의 재災구성] 우리 손으로 만든 참극, 역대 최악의 사회적 재난 TOP5

 

 

‘국민의 생명·신체·재산과 국가 전체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것.’ 재난의 정의입니다. 재난관리법에서는 재난을 크게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으로 분류하고 있는데요. 사회재난은 인적재난, 사회적 재난을 포함하는 것으로 화재, 붕괴, 폭발, 교통사고, 환경오염사고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회재난 소식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듭니다. 태풍이나 홍수 같은 자연 재난과는 달리, 미비한 국가시스템이나 사람들의 안전의식 부재 등 인재(人災)적인 요인이 많기 때문이죠. 즉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일들이란 얘기입니다. 본 콘텐츠에서는 1990년대 이후 전 국민을 안타깝게 했던 사회재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거론된 사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스스로 가진 안전의식에 대해 점검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본 콘텐츠에서 제시하는 순위는 공식 집계된 사상자 수(실종포함)를 기준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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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2000년대 초반부터 사회적 재난을 ‘재난’으로 정의하며 대응하기 시작했다.

 

 

 

 

5위_ 꽉 막힌 탈출로가 불러온 참사, 제천 복합건물 화재 (사상자 66명)

 

 

 

2017년 12월 21일. 제천시 하소동 복합건물 1층 주차장에서 화재가 발생합니다. 공사 중 불이 붙은 스티로폼이 차량에 떨어지면 발화한 것이 원인이었죠. 불은 천장 내부의 가열성 단열재를 태우며 순식간에 1층 천장 내부 전체로 번져가더니, 세력을 키워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순식간에 8층 건물 전체를 뒤덮은 불로, 29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입었던 사건, 일명 ‘제천 복합건물 화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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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현장(사진: 제천소방서)

 

 

 

화재가 일어난 복합건물은 주차장, 목욕탕, 헬스클럽 등으로 이뤄진 스포츠센터였습니다. 사망자 29명 중 20명이 2층 여성 사우나에서 발견되었는데요. 이는 ‘필로티 구조(1층이 계단실과 기둥으로만 구성된 구조)’의 특성 상, 발화지점에서 실질적으로 가까운 곳이 2층이었기 때문입니다.

 

고질적인 안전 불감증은 이번에도 피해를 키웠습니다. 2층 여성 사우나에는 화재경보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죠. 화재 대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소방점검 또한 소홀했었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2층 여성 사우나의 탈출로였던 비상계단은 적치물로 막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명백한 법령 위반이었죠. 남은 탈출로였던 중앙계단 역시 자동문으로 막혀있었습니다. 참고로 화재로 인해 자동문이 단전이 되면, 대피 시 오히려 단단한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사고 이후 건물 내 자동문 역시 지하철 스크린도어처럼 수동개폐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대피방법 안내의 부실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습니다.

 

 

 

 

4위_ 환자들 검은 연기 속에 빠뜨린 무사안일주의,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상자 155명) 

 

 

 

제천 복합건물 화재가 발생한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 또 다시 대형 화재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2018년 1월 26일 발생한 ‘밀양 세종병원 화재’였습니다. 밀양시 가곡동에 소재한 세종병원에는 당시 177명이 입원해 있었는데, 이중 46명이 사망하고 109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화재는 석고보드 천장 위로 깔린 전선이 합선되며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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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세종병원 화재 현장(사진: 경남경찰청)

 

 

 

밀양 세종병원 화재의 인명피해가 컸던 것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다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병원은 요양병원과 같이 운영되고 있던 곳이었죠. 연기와 유독가스는 빠르게 환자들을 덮쳐 인명피해를 키웠습니다. 실제로 소방 당국은 “화상으로 인한 사망자는 없다”고 밝히기도 했죠.

 

당시 입원 중이었던 환자 강씨는 “비상벨이 10분 동안 울리는데 간병인은 오작동이라고만 말할 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혀 세간의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한 소방관계자는 3층 중환자실의 환자 대부분이 한쪽 손이 침대에 결박되어 있어, 결박을 푸는 데만 1명당 30초에서 1분가량이 걸렸다고 토로하기도 했죠.

 

병원관계자들의 안전 불감증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세종병원은 사고 당월 9일에 소방특별조사를 받고 시정조치를 명령 받았습니다. 피난기구에 바닥고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밀양소방서 측은 “요양병원 내 환자들은 화재 시 스스로 대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피해가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병원은 시정조치를 둔감하게 받아들였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이 같은 참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결국 병원 법인 이사장 손 모씨는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로 징역 12년을 구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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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세종병원 화재 피해자 합동분향소에는 한 달 전 사고로 가족들을 잃은 제천 복합건물 화재의 유족들이 찾아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습니다.(사진: 중앙일보)

 

 

 

 

3위_ 이기심에 수몰된 진실, 세월호 침몰사고 (사상자 304명)

 

 

 

2014년 4월 16일. 전 국민을 비탄에 빠뜨린 비극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세월호 침몰사고죠. 당시 세월호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 다수를 비롯, 탑승객 4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오전 8시 30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해상에 진입한 세월호는 맹골도와 서거차도 사이를 최고 속도로 진입, 항로를 바꾼 후 지그재그로 운행하다가 급격히 항로를 바꾸던 중 전복하여 침몰했습니다. 전체승객 476명 중 단원고생 250여 명을 포함한 305명이 죽거나 실종됐죠. 이는 한국의 해난사고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입니다. 또한 역대 수학여행 사고 중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참사기도 하죠. 더욱 안타까운 점은 사망자의 83%가 미성년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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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순간을 상공에서 촬영한 모습(사진: SBS)

 

 

 

세월호 침몰 사고는 곱씹을수록 화가 나는 인재였습니다. 인명피해가 극대화된 원인은 당시 “가만 있으라”고 했던 선내 안내방송 때문이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으로 올라와 구조만 기다렸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죠. 선객 대다수는 미심쩍은 정황에도 안내방송을 따르다가 배 안에 갇힌 채 익사했습니다. 이후 수사과정에서 선장 및 선원들이 승객들에게 추가지시 없이 가장 먼저 빠져나온 사실이 드러나며 전 국민의 공분을 샀죠.

 

충격적인 사고인 만큼 여파도 컸습니다. 사고 당시 대통령의 행적에 의혹이 일었고, 이는 탄핵 여론 형성의 시발점이 되어 정권이 바뀌는 결과까지 낳았죠.

 

 

 

 

2위_ 태풍‧지진보다 무서운 사람… 최악의 인재(人災), 대구 지하철 화재 (사상자 411명)

 

 

 

2003년 2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대구 지하철 화재는 대한민국에서 인명피해가 가장 큰 철도사고였습니다. 이 사고로 사망자 192명, 부상자 148명, 실종자 21명이 발생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1995년 289명이 사망한 아제르바이잔 지하철 화재 참사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사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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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화재 현장(사진: 조선일보)

 

 

 

이 사고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인재의 전형이었습니다. 뇌졸중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을 앓던 방화범 김대한은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다 자살을 결심하고 지하철에 올라탔죠. 그는 중앙로역에서 열차가 서행하자 미리 들고 있던 석유 플라스틱 통에 불을 붙였고 이는 수 초 만에 큰 불로 이어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때부터였죠. 당초 김대한이 탔던 1079호 열차는 정차 중이었으므로 승객들의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정차 통과를 해야 했던 1080호 열차가 사령실의 오판으로 중앙로역에 정차하며 피해를 키웠죠. 설상가상 1080호 열차 기관사는 사령실의 지시로 마스터키를 뽑고 탈출해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출입문이 닫히면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수동으로 문을 열 수 있는 비상레버 사용법이 지금처럼 전동차 문짝과 옆면에 크게 게시되지 않았습니다. 레버 주변에만 작게 표기되어 있어 위급한 상황에서 인지하기가 힘들었죠.

 

사고 다음날 정부는 대구를 특별 재난 지역으로 선포했고, 당월 25일 대구시 당국은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을 해임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고 직후 시청 공무원, 지하철 종사자, 군 병력이 사고를 축소, 은폐하고 사고 열차를 차량기지로 가져와 대대적으로 물청소를 하는 등 현장과 증거를 훼손했던 사실이 밝혀져 더 큰 충격을 안겨주었죠. 방화범과 기관사, 종합사령실 직원 등 지하철 관련자 8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이 참사의 여파로 약 2년 간 대구 지하철 이용객이 반 이상 감소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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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화재는 비상시 문 여는 방법 안내문이 큼직하게 붙게 된 계기가 되었다.(사진: 네이버블로그)

 

 

 

이 참사로 유사상황을 가정한 대피훈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객실 내 안내방송 및 영상으로 상세한 화재대처법을 방송하게 되었죠. 이전까지 매우 작게 안내되어 있던 비상시 문 개방 방법이 문이나 문 바로 옆 좌석 위에 큼직하게 붙게 된 계기 역시 대구 지하철 화재였습니다. 또한 현재 운영 중인 모든 철도 회사에는 ‘잊지 말자, 대구 지하철 참사’라는 글이 공문, 포스터에 항상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1위_ 생지옥을 만든 허망한 모래성,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사상자 1,445명)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지금까지도 쉽사리 잊혀 지지 않는 충격적인 사고입니다. 부실공사 및 관리가 불러온 대표적인 참사로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현재는 사망으로 처리)을 발생시킨 한국 역사상 최악의 사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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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사진: 한겨레신문)

 

 

 

1989년 12월에 개장된 삼풍백화점은 당시 전국 2위 규모의 단일매장이었습니다. 원래 대단지 종합상가 ‘삼풍랜드’로 설계되어 공사가 진행되었죠. 하지만 완공에 가까워질 무렵 건축주인 이준 회장이 갑작스레 건물 용도를 백화점으로 변경했고, 시공사에게 본래 4층이었던 설계를 바꿔 5층으로 완공할 것을 요구합니다. 시공사인 우성건설 측이 붕괴 위험성 등을 이유로 증축을 거부하자 계약을 중도 파기하고 시공을 이어가는 강수까지 뒀죠. 사실 설계를 변경하려면 구조 전문가의 검토가 필수적이지만, 이조차 무시했습니다.

 

이렇게 원칙을 무시하고 진행된 공사는 점점 더 막장으로 흘러갔습니다. 넓은 매장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상가건물의 벽을 없애면서 기둥이 모든 하중을 감당하게 됐고, 이것도 모자라 남은 기둥들의 지름을 25% 정도 깎기도 했죠. 삼풍백화점 측은 불법 증축한 5층에 관련 부처의 승인 없이 대형 음식점을 유치합니다. 상당한 무게의 냉장고와 주방 기기, 세라믹 식기, 가구들이 들어섰고 바닥에는 온돌 난방 시설까지 설치되었죠. 그야말로 시한폭탄을 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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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풍백화점은 파격적인 디자인과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사진: 당시 언론)

 

 

 

사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중앙홀과 B동 건물, 5층 북관 식당가 천장 전체 등에서 모래가 떨어질 정도의 붕괴 조짐을 보였죠. 건물 전체를 폐쇄하고 마땅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경영진은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붕괴 당일 백화점에서 도망쳤습니다. 붕괴 17분 전의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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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전 삼풍백화점 옥상에 일어난 균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예정된 참사였다.

 

 

 

 

결국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은 옥상에서 시작된 붕괴를 시작으로 5분 만에 완전히 내려앉습니다. 지하 3층까지 모조리 무너져 내렸죠. 수많은 행인들과 인근 건물에 있던 사람들까지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리거나 먼지를 뒤집어쓰는 등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고 현장을 취재한 언론은 하나같이 ‘지옥’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 정도로 참혹했죠. 여기에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잔해 더미 속을 파내며 희생자들의 소지품을 뒤지고,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집어가는 모습을 보여 충격을 안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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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현장에서 상품을 집어가는 여성. ‘악마의 미소’라는 이름으로 보도되었다.(사진: YTN)

 

 

 

지금까지 소개된 재난을 다시금 돌이켜보면, ‘조금만 더 꼼꼼히 점검했더라면…’, ‘조금만 더 정신 차리고 대처했더라면…’이란 아쉬움이 절로 듭니다. 앞서 언급한 재난들은 국민들을 울게 했고, 분노하게 했으며, 불신하게 만들었죠. 이런 사고들을 다시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원칙을 준수해야 하고, 각자 맡은 소임을 다해야 하며, 경각심을 가져야합니다. 비상 상황 시 규칙을 무시하면 어떤 피해가 오는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어떤 파국을 맞는지, 안전에 불감하면 어떤 재앙이 닥치는지… 위 사례들이 명징하게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사회적재난 #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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