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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의 위로]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_ 에세이 <제법 안온한 날들>

2020.07.21

[한줌의 위로]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_ 에세이 <제법 안온한 날들>

 

 

 

 

여러모로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위로 받고 싶을 때 어떤 말을 들으면 가장 힘이 나시나요? 흔히들 위로할 때 “힘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사실 이 말을 들으면 힘을 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느껴져 오히려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의 제일 첫 원칙은 간단합니다. ‘공감’하는 것이죠.

우리가 에세이를 읽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우리와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삶에 대한 얘기를 하는 에세이를 보면 나와 이렇게나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도 결국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에세이 <제법 안온한 날들>은 응급의학과 의사인 저자 남궁인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마주한 평범하지만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전까지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바라본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만약은 없다>, <지독한 하루>를 집필했습니다. 사랑이야기로 이뤄진 <제법 안온한 날들>은 조금 색다른 행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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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학과 의사인 저자 남궁인이 쓴 <제법 안온한 날들> 표지(사진: yes24)

 

 

 

 


책 소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매번 인간의 운명을 지켜봐야 했던 그에게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제법 안온한 날들>은 고통과 그럼에도 끝내 찾아오는 기적 같은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불행과 슬픔의 뒤엔 끝내 찾아올 기적 같은 회복이 있다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생과 삶의 갈림길에 선 사람을 직접 목도하는 것, 일상적으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광경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저자가 전하는 그 광경은 활자를 넘어 생생하고도 끔찍한 전경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집니다.

“새벽녘,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양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며 들어왔다. 휘청거렸으나 제 발로 걷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그리 죽음과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가 걷는 모습을 보았다. 정확히 세 발자국을 걸었을 때, 그의 포갠 주먹 틈을 비집고 핏줄기가 튀어나왔다. … 의료진이 가위로 그의 티셔츠를 허리부터 목까지 단숨에 잘랐다. 피칠갑 아래 선명한 상처 두 개가 보였다.”


저자의 이런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결정할 수 없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무력함이 느껴집니다.

“그가 살아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내가 그의 생사를 아는 것은 그의 생사에 도움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병원에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욕실에서 샤워기를 틀고 거울을 보았다. 어깨가 무겁게 처진, 지치고 발가벗은 사내가 보였다. 아직 팔과 어깨에 희미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눈물이 났다. 그는 나를 마지막까지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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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늘 생과 삶의 갈림길을 목도하며 그 속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이야기들은 ‘왜 하필 의사가 사랑 이야기를 들고 왔을까’라는 의문에 오히려 반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후회할 일은 뭘까.”

여기에 돈, 명예, 인기, 권력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마 없겠죠. 타인의 죽음을 일터에서 마주하는 저자가 사랑 이야기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제법 안온한 날들>의 첫 수록 편에는 평생을 해로한 할아버지가 아내인 할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죽음을 두고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헤아렸다. 오랜 투병을 거친 할머니였지만, 급박한 처치가 이뤄지던 수술대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 위는 책임이 발생하는 곳이다. … 복잡한 생각으로 현장을 정리하려던 우리에게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애절한 표정이었다. ‘환자에게 할 말이 있어요.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지금 말해야 됩니다.’”

“할아버지는 가운과 수술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혼자 걸어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한 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뻣뻣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 이윽고 할아버지는 시선을 붙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기다리고 있게. 먼저 편히 가게나. 곧 가겠네. 곧 따라가겠네. 자네. 지금 모습이 조금 수척할지라도, 자네의 영혼은 편안해졌음을 믿는다네. … 예기치 못했지만, 괜찮네. 곧 보세. 좋은 곳에서. 헤어지지 않을 것일세. 이젠 헤어지지 않겠네. 사랑하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 가게. 잘 가게나……”

할아버지의 마지막 고백은 ‘숱한 죽음을 목격했던 강철 같은 사내들’도 울게 만들었습니다. 죽음의 책임을 고민하던 그 가운데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고백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저자는 퇴근길에 어머니에게 전화해 이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그 자리에서 잘잘못을 따지던’ 것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죠. 그리고 어머니는 대답합니다.

“사랑은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거의 인생만큼 긴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영속할 수밖에 없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죽어 떠나도 사랑만은 그 자리에 영속성의 무엇으로 남아 할아버지에게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전까지 전작에서 응급실에서 지켜보는 죽음의 이야기를 했던 저자는 사람에게 닥친 불행에서 나아가 회복과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현장에 있어도 한 발짝 물러나면 ‘제법 안온한’ 일상이며, 고통은 지나가고 사람은 회복하고 일어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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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침범할 수 없는 영속적인 것입니다.

 

 

 

 



가장이 쓰러져 휠체어에 앉게 된 불행한 상황에도 남은 가족이 슬픔을 딛고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담은 ‘희망’ 편에서는 그런 그의 깨달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가족이 돌이키지 못할 불행을 겪거나 가장이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있을지라도, 사람들은 현실을 비관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오히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끌어안고 돌보며 각자 저마다의 위치에서 앞길을 찾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성장한다. 내가 세상만사를 슬픔에 찬 눈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동안, 휠체어에 앉은 그는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세상을 견디고 있었으며, 가족들은 그를 돌보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일을 했다.”

“그 시절 나는, 가족들이 전부 건강하고 이렇다 할 좌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응급실에서 절규하는 사람을 본다는 이유로 불행을 재단하는 습관을 이어왔다.”

저자는 끊임없이 불행을 생각하고, 불행인지 아닌지 재단하는 게 습관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슬픔과 불행에 길들여지는 것, 그 모든 무력함에 당연해지는 것……. 우리를 급작스럽게 찾아왔던 고통이 당연해진 요즘, 혹시 우리 역시 희망과 회복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요?

고통과 슬픔, 불행이 습관처럼 당연해진 요즘에도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는 희망과 회복을 위해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내 찾아올 기적 같은 회복을 잊지 않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게 우리가 우리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싹은 어디에서든 피어난다. 그리고 척박한 곳에서 움튼 싹은, 오히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한다. 우리는 주저앉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병원을 나간 사람들은 시련을 극복하고 때로는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것이다. 한참 고된 생활에 취한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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