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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스토리] #2 수난(水難)시대 이겨낸 전 국민의 힘, 희망브리지의 탄생을 이끌다

2020.06.17

[희스토리] #2 수난(水難)시대 이겨낸 전 국민의 힘, 희망브리지의 탄생을 이끌다 

 

 

 

 

 

20세기 이후 전 세계에서 발생한 자연재해는 총 35,000여 건. 태풍, 홍수, 지진, 폭염, 화산폭발 등 지구의 변덕에 무려 8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8천조 원이 넘는 재산피해를 야기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던 재해는 바로 ‘홍수’입니다. 무려 절반가량이 홍수에 희생됐다고 분석됐죠. 역대 단일 재해 사망자 순위 역시 1931년 장강 홍수(사망자 200~400만 명 추정)와 1887년의 황하 홍수(사망자 200만 명)가 순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고대 시대부터 수해의 내습으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다는 사료가 남아있습니다. 1839년 헌종 8년에는 ‘장맛비가 여러 달 동안 내려 낙동강이 범람했고 전국 14,000호의 민가가 떠내려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후에도, 한강의 흐름을 바꿔버릴 정도의 강력한 홍수였던 을축년 대홍수(1925년)나, 7월 역대 1위의 강수량(1364.2mm)을 기록했던 1940년 여름 장마 등 큰 홍수가 빈번하게 발생해 전 국토를 물난리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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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자연재해이며, 우리나라 역시 최근 10년간 발생한 자연재해의 대부분이 홍수피해다.

 

 

 

 


복합 피해 야기하는 홍수, 온 국민들 ‘마음의 방파제’ 쌓았다

 

 

 

 


홍수가 가장 무서운 재난으로 군림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거의 정례적으로 발생하는 재난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지난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 간, 우리나라에서 홍수로 1천억 원 이상의 재산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해는 2001년과 2005년 단 두 해 뿐이죠. 특히 2002년과 2003년 태풍 ‘루사’와 ‘매미’가 연이어 한반도를 덮치면서, 총 377명의 인명 피해와 9조3천억 원이 넘는 재산피해를 발생시켰습니다. 이쯤 되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비극인 셈이죠.

피해가 2차, 3차로 계속 확산될 수 있다는 점도 홍수의 무서움입니다. 단순 범람에 의한 사상자 외에 추가 피해가 심각하죠. 논밭이 물에 잠겨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치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가축 피해나 건축물 붕괴도 자연스레 뒤따릅니다.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 퍼지기 쉬운 수인성 전염병도 큰 문제죠.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로 구성된 탓에 산사태와 토사 유출로 이어지기도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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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는 여러 가지 2차 피해를 발생시키는 무서운 재해다.

 

 

 

 


감당할 수 없는 외부의 적은, 내부의 단단한 결속력과 하나 된 의지로만 이겨낼 수 있습니다. 홍수에 대해 ‘한 마음 한 뜻으로 피해를 최소화해보자’는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민간모금 운동이 일어난 계기가 바로 ‘홍수’였습니다. 1920년 7월, 계속되는 폭우로 한강이 범람하여 서울 전역이 물에 잠겼고 주민들의 피해는 극에 달하고 있었던 때였죠. 하지만 정부(당시 조선총독부)는 늑장대응으로 일관했고,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민간에서 먼저 움직였습니다. 그해 4월 창간한 동아일보가 국민들의 성금 모금에 불을 당겼고, 이는 이후 조선일보 등 다른 언론사의 모금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죠.

 

 

 

 


재해와 수해가 동의어였던 시절, 희망브리지의 역사가 시작됐다

 

 

 

 


민간모금 운동의 불씨는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61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대한민국의 1960년대는 해방 세대가 첫 성인이, 6‧25세대는 첫 십대가 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는 곧 절망보다는 희망을 상징하는 때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대의 베이비붐 세대가 태어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급속한 경제 성장도 이루어 나갔죠.

이러한 정서는 모금활동의 체계화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줬습니다. 이전까지는 단편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뤄졌던 모금활동이 1960년대에 접어들며 모양새를 갖춰나가기 시작했죠. 학생모금, 공무원모금, 극장모금, 경기장 모금, 우표 모금 등 다양한 모금 형태가 등장하며, 모든 국민이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기부‧나눔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습니다.

자연스레 ‘우리나라에도 이제 제대로 된 전문 모금기구를 탄생시킬 때가 되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1961년 7월 13일 설립된 것이 바로 ‘전국수해대책위원회’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거부터 우리를 가장 빈번하게 위협했고, 가장 큰 피해를 야기했던 재난은 바로 수해(水害)였습니다. 국내 최초의 민간 모금기구의 초기 명칭에 ‘수해’를 품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당시 수해가 어느 정도 두려운 존재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이 기구는 같은 해 10월 ‘전국재해대책위원회’로 이름이 바뀌며 창립총회를 개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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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서울 한강로의 장마철 수해 모습. 1960년대는 호환‧마마‧전쟁보다 무서운 게 ‘물난리’였다. (사진: 국가기록원)

 

 

 

 


1964년 명칭을 다시 ‘전국재해대책협의회’로 바꾼 이 기구는 그때부터 우리나라 모금 문화의 토대를 닦는 활동을 이어나갑니다. 1965년에는 필리핀 ‘타알’ 화산폭발피해 복구를 위한 성금을 모아 주한 필리핀대사관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가 불과 몇 년 전까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원조로 지탱했던 나라라는 것을 감안하면 꽤 인상적인 모습입니다. 지금은 굉장히 익숙해진 ‘사랑의 열매’ 달기 모금 캠페인을 최초 전개한 것도 역시 이 기구의 몫이었죠. 1966년 열린 ‘사랑의 열매’ 첫 자선파티에는 각계각층의 인사가 300명이 넘게 참여해 기부‧나눔 문화 활성화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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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5월, ‘사랑의 열매’ 달기 모금 캠페인이 국내 최초로 전개됐다.

 

 

 

 


이 기구는 이후 1968년 10월 23일 사단법인 체제로 변화하며 비로소 독립기관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할 수 있는 법적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전 국민 참여 모금의 대명사가 된 ‘수재의연금’을 진두지휘하며 우리나라 성금 모금 분야의 방점을 찍었죠.

1961년 전국수해대책위원회로 시작해 전국재해대책위원회, 전국재해대책협의회 등으로 개칭되며 함께의 가치와 희망의 소중함을 널리 알려왔던 그 기구가 바로 오늘날의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입니다.



 

#수해 # 홍수 # 희망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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