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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의 커뮤니티] 재난구호, 이젠 중장기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 때...라정일 희망브리지 재난안전연구소 부소장 특집인터뷰

2020.04.22

[재기의 커뮤니티] 재난구호, 이젠 중장기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 때...

라정일 희망브리지 재난안전연구소 부소장 특집인터뷰

 

 

 

 

"일본에선 지진 예측 분야에만 1년에 조 단위의 돈을 씁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지진을 미리 알아챈 적이 없죠. 그게 자연 재난의 섭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방재(防災‧재해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뻔합니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가는 힘을 기르는 것이죠."

 

 

 

 


라정일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이하 희망브리지) 재난안전연구소 부소장의 말은 재난을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를 함축한다. ‘피할 수 없으면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의 근원이 바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다. 재난 발생 후 피해자들이 온전히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일컫는 이 단어는 현대 재난구호 분야에서 가장 필수적인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힘을 키울 수 있을까? 라 부소장은 2019년 강원산불 재난의 복구 과정 속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강원산불 1주년을 맞아 그가 알려주는 재난 극복의 비결을 직접 들어봤다.  

 

 

 

 

※라정일 부소장은…
2005년 일본 교토대학 방재연구소 재난위기관리연구실에서 석·박사(도시사회공학)를 취득하고 2011년부터 일본 국립 돗토리대학 조교수, 2019년 1월 충북대학교 국가위기관리연구소 소방방재연구센터장을 거쳐 2019년 6월부터 희망브리지 산하 재난안전연구소 부소장을 맡고 있다. 연구분야는 재난관리정책, 안전취약계층 재난구호, 주민참여형 안전마을만들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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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피할 수 없는 것,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 라정일부소장

 

 

 

 


- 전 국민을 안타깝게 했던 강원 산불이 1주년을 맞았다. 먼저 복구 과정에 대한 소회를 듣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국가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됐었다. 정부가 빠르게 판단을 내렸고, 전 국민이 힘을 모아 주었다. 아마 지금도 강원도를 향해 달리는 소방차의 긴 행렬이 눈에 선할 것이다. 정부, 지자체, 시민단체, 국민 등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더 큰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씁쓸한 구석도 있다. 매스컴을 통해 여전히 봉합되지 못한 갈등 소식이 들려온다. 심지어 피해 지역의 비상대책위원회가 위원장을 고소‧고발하는 해프닝까지 일어났다. 전 국민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준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 왜 그런 갈등이 일어나는 것인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사회재난의 지원 기준이 모호한 탓이다. 자연재해는 재해구호법상 지원 기준이 명확하다.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재난은 소위 ‘복불복’이다.(자연발화가 아닌 산불은 모두 사회재난에 속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원래 강원도 고성 지역은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인데, 2018년 산불로 집이 전소된 가구와 지난해 같은 피해를 입은 가구의 보상액이 많게는 서른 배까지 차이가 난다. 누군가는 불만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단편적‧일회성 지원이 가진 한계 때문이다. ‘재난 피해에는 예후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케어가 중요한데, 지금까지 국내의 재해구호는 성금이나 구호물품을 전달하는 것이 중심이 됐다. 지난해부터 ‘긴급구호에서 중장기구호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이란 주장이 대두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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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가 휩쓴 보금자리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는 강원산불 이재민

 

 

 


“재난을 스스로 이겨내는 힘…
우린 그것을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른다.”

 

 



- 중장기 구호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끊임없이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뜻인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스스로 재난을 이겨내고 일상으로의 돌아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돕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힘이 바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다. 쉽게 말하면 ‘오뚜기 정신’같은 것인데, 이 역량이 크면 클수록 더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재난관리의 기본은 예방-대비-대응-복구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가 지속적인 선순환을 만들면 재난 극복은 물론 지역 성장까지 일궈낼 수 있다. 일례로, 다리가 무너져서 다리를 다시 짓는다고 해보자. 이때 전보다 훨씬 튼튼하고 주민 편의까지 고려해서 넓게 짓는다면 대응하고 복구하는 단계에서 예방과 대비까지 이뤄지는 것이고, 지역사회의 발전까지 이어질 수 있다. 재난의 경험과 교훈을 살려 더 나아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회복탄력성의 키(key)라고 할 수 있다.”


- 마치 우리나라가 지난 메르스의 경험과 교훈을 통해 코로나19의 방역에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처럼 말인가?
맞다. 우린 감염병에 대해 회복탄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웃나라 일본은 명실상부 재난대응 선진국이다. 지진, 해일 같은 재난 관련 매뉴얼과 훈련 시스템도 훌륭하고, 시장에 별의별 구호제품도 다 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사태를 맞아선 다소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일본의 회복탄력성은 자연재난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이 부족하니, 이를 통한 교훈도 축적하지 못한 것이다.


- 당장 재난 피해를 당한 이재민에게 그로부터 교훈까지 얻으라는 말은 다소 이상적으로 들리는 부분도 있다.
좋은 지적이다. 주민들의 힘만으론 할 수 없고 그렇게 나둬서도 안 된다. 회복탄력성 향상을 위해선 주민, 정부와 지자체, 시민단체, 연구기관 등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역량을 키우기 위해선 이른 바 지역사회의 ‘취약성’을 먼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 지역이나 국가의 상황과 역량이 다르고, 그에 따른 대응 수준도 다르다. 이번 코로나19사태에서 이탈리아가 큰 피해를 보는 이유는 고령화율 세계2위라는 사회 취약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는 힘을 키우기 위해선 지자체의 재난 대응력, 지역 커뮤니티의 힘, 시민단체의 뒷받침 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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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코로나19 대응에 매끄럽지 못한 이유는 그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사진: TBS)

 

 

 


“재난 지역의 회복탄력성을 좌우하는 것은
지역 커뮤니티의 힘과 협동체계”

 

 



- 듣다보니 결국 ‘지역사회’가 중심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앞에서 말한 지속적인 구호의 대상은 이재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물론 지역사회를 포함한다. 지역사회는 생활과 문화를 같이 하는 운명 공동체다. 이번 코로나19를 봐도, 대구 시민과 서울 시민의 예민도가 판이하게 차이나지 않나. 그래서 지역이 중요한 것이다.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해 6천400여 명이 희생됐다. 조사 결과 구호 활동에 참여한 소방관이나 자위대는 2.5%에 불과했고 생존자의 97.5%가 지역 이웃, 가족, 자력으로 구조됐다고 한다. 정말 필요할 때 똘똘 뭉칠 수 있고, 함께 이겨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역사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역사회 전체의 회복탄력성을 키우는데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 지역사회의 회복탄력성을 통해 재난을 극복한 실제 사례가 있나?
국내에선 강원도 인제군 가리산리를 꼽을 수 있다. 2006년도에 큰 수해가 나서 170명의 마을 주민 중 8명이 사망했는데, 2008년부터 마을의 재난 경험을 방재체험교육 프로그램으로 승화시켰다. 마을 주민들이 하천 도하 훈련, 심폐소생술, 대피가방 꾸리기 같은 교육 및 체험 훈련을 직접 마련한 것이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강사로 나서다보니 자연히 재난에 강한 대응력이 생기고, 체험 학습 행렬이 늘면서 마을도 활성화됐다. 2014년에는 ‘방재활동 우수마을 경진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메라피 화산 마을도 좋은 사례다. 화산 인근 8개 마을에서 2009년부터 2년 간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정기적인 대피 훈련과 화산 지역 커뮤니티 방재 파일럿 프로젝트 등이 주된 활동이었다. 공교롭게도 2010년 10월에 메라피 화산이 200년 만에 대폭발하여 4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이 8개의 마을에선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지역 커뮤니티의 힘과 협동체계, 즉 지역의 회복탄력성이 만든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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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6일, 속초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산불피해 치유를 위한 주민화합 행사’. 라 부소장은 이 행사를 “한국형 지역사회 중장기 구호의 초석이 될 만한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4‧4 강원산불… 뼈아픈 기억이지만
한국형 커뮤니티 구호의 가능성 엿봤다“

 

 



-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강원산불 복구 역시 개개인에 대한 지원보다는 지역 전체의 역량을 키우는 식의 지원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앞서 정부, 지자체, 시민단체, 연구기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지만, 모두 돕는 역할을 할 뿐이다. 지역사회 회복은 결국 지역이 주체가 되어서 지역 스스로 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강원 산불 복구 과정에서 그 희망을 엿봤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 어떤 희망을 말하는 것인가?
산불이 나고 5개월 정도가 흘러 추석이 됐을 때, 희망브리지에서는 산불 피해 지역 18개 마을에 지역 주민 간 어려움을 해소하고 주민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상품권을 지원했다. 이재민은 물론, 일반 주민분들, 자원봉사자, 지자체 등 지역 전체가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속초시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영랑동에서는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지역 종교기관 등과 함께 협동하여 지역의 힘으로 이를 훨씬 더 발전시켰다. 말 그대로 주민 모두가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든 것이다. 행사명도 ‘산불피해 치유를 위한 주민화합 행사’다. 이재민이든, 자원봉사자든, 지자체 담당자든 다 같이 어울리고, 함께 힐링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랑동 전체 주민이 900명인데, 이날 700명이 모였다. 지역사회가 마음과 뜻을 모으면 어떤 광경이 벌어지는지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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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험을 힌트 삼아, 지역 중심의 중장기구호를 발전시켜나가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것 같다.
그렇다. 사회 변화에 발맞춰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서도 ‘안전 취약계층’으로 분류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 15세 이하 어린이, 65세 이상 노인, 차상위계층,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 장애인, 외국인 등 어떻게 보면 사회복지의 대상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재난복지’의 개념이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복지를 말할 때 일회성 지원을 생각하지 않듯, 재난구호 분야도 점점 지속가능한 지원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하지만 단순 수혜성 지원은 언제나 부작용이 있다. 그래서 지역사회의 역량이 향상되어야 한다. 지역의 유대감과 연대감을 강화해 그 힘으로 재난도 더 빨리 극복해내고, 성장과 발전도 견인할 수 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이미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떼었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재난구호 # 레질리언스 # 지속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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