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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오늘·그일] 전조를 무시한 대가가 부른 참사, 1994년 오늘 성수대교 붕괴!

2019.10.21

[그때·오늘·그일] 전조를 무시한 대가가 부른 참사, 1994년 오늘 성수대교 붕괴!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라는 이론이 있다. 큰 사고는 우연히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오랜 기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사실로 입증됐다.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고 방치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막지 못한 결과는 언제나 참혹한 법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오늘, 대한민국 한강 다리 하나와 국민들의 억장이 함께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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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성수대교 붕괴 현장(사진: 대한민국 소방)

 

 

 


믿을 수 없는 참사가 가져온 충격 

 

 

 

1994년 10월 21일 금요일 0시를 넘긴 시각, 성수대교를 지나던 운전자들은 다리 상판 이음새에 가로 2m 세로 1.3m 크기의 대형 철판이 깔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음새 중간에 심하게 벌어진 틈새를 덮기 위해 서울시가 임시방편으로 취해 놓은 조치였다.

이음새 틈새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졌다. 그날 오전 6시 경에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한 운전자는 다리 위 노면에서 큰 충격을 느껴 신고 전화를 했지만 서울시는 교량 통제 등의 긴급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오전 7시 48분 경 성수대교의 제 10·11번 교각 사이 상판 50여m가 내려앉는 붕괴참사가 발생했다. 사고 지점을 통과 중이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4대는 48m 길이의 이음새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다. 성수대교 남단에서 북단으로 달리던 시내버스 한 대 역시 붕괴 지점을 발견하고 급정거를 시도했지만 멈추지 못하고 한강에 빠지고 말았다.

총 6대의 차량과 49명의 탑승자가 추락했고, 이 중 32명이 사망했다. 특히 시내버스의 경우 기사 1명과 승객 30명 중 단 2명만이 살아남았다. 사고 발생 시각이 오전 출근 및 등교 시간이었던 탓에 희생자 대부분은 직장인과 학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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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성수대교 절단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사진: 대한민국 소방)

 

 


성수대교 붕괴는 사망자 수로만 볼 때, 인명피해 규모가 매우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비행기 추락이나 건물 붕괴, 대규모 교통사고 등 국내외에서 종종 발생하는 재난들은 훨씬 많은 사망자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성수대교 붕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수도 중심에 있는 멀쩡한 한강 다리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사례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무시했나? 

 

 

 

“그렇게 걱정들 했는데도 기어이 오늘 벌어진 성수대교 붕괴 참사는 예고된 인재(人災)였습니다. 안전에 대한 우리의 무사 안일한 자세를 보다 통렬히 자성하기 위해 동강 난 다리 앞에서 뉴스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1994년 10월 21일 MBC 뉴스데스크, 엄기영 앵커 오프닝)

당시 언론에서는 사고가 나기 1년 전부터 한강 교량의 보수 및 관리가 매우 부실해 붕괴사고가 우려된다는 보도를 연이어 내보냈다. 이는 전반적으로 교량 보수가 시급하다는 전문가들의 진단 때문이었는데, 서울시는 이를 계속해서 외면하고 위험성을 방치했다.

물론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시공사인 동아건설의 부실공사였다. 다리 이음새를 용접하는 시공이 엉망이었고, 붕괴 직전까지 유지·보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성수대교 인근에서 수중 촬영을 실시한 결과 이음새의 볼트가 손으로 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고, 볼트 구멍도 제멋대로 뚫려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당시 건설사 측은 서울시가 늘어난 교통량을 감안하지 않고 차량을 통제하지 않아 사고를 유발했다고 주장했다. 최초 설계 단계에서는 하루 통행량을 8만대 정도로 설계했지만, 실제 하루 통행량은 2배가 넘는 16만대 이상이었다. 왕복 4차로에 불과한 탓에 교통 체증은 상습적이었다. 특히 붕괴 1년 전 1993년 동부간선도로 성수-상계 구간이 개통되면서 성수대교 교통량이 폭증했는데도, 당시 서울시는 하중 제한만 조정한 채 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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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성수대교는 하루 종일 이런 상태였다.

 

 


성수대교는 육군 전차가 다닐 수 있는 18톤 하중으로 설계됐지만, 그 이상의 무게를 가진 차량도 쉽사리 다리를 오갔다. 철저한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다. 당시 성수대교 북단에는 당시 삼표레미콘 공장이 있었는데, 최대 적재중량 25톤의 레미콘 트럭들이 성수대교를 수시로 오갔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들이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분노와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영덕 국무총리가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이원종 서울시장은 전격 경질됐다. 서울시는 성급하게 ‘3개월 내 완벽 보수 후 재개통’을 약속했다가 성난 민심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정부는 성수대교의 보수 대신 재건설을 결정하는 한편, 한강에 있는 모든 다리를 전수 조사했다. 그 결과 지하철 2호선 합정역과 당산역을 잇는 당산철교의 안전성에 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확인돼 운행을 중단하고 전면 재시공에 들어갔다. 당산철교는 성수대교가 무너지기 전부터 위험성이 계속해서 지적돼 지하철 기관사들이 철저하게 서행으로 통과하는 곳이었다. 이어 심각한 노후화가 드러난 양화대교와 광진교, 상판에 구멍이 뚫린 한남대교 역시 새롭게 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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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작업이 진행 중인 성수대교(사진: 대한민국 소방)

 

 


현재 한강에는 31개의 다리가 놓여 있고, 하루 교통량은 300만 대가 넘는다. 자가용과 버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 학교와 회사를 오가는 이들이 오늘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한순간의 방심은 이내 사고가 되고, 이는 곧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된다는 걸 우린 25년 전 오늘 똑똑히 확인했다. 오늘날의 안전은 사고를 통한 반면교사가 아니라 철저한 사전 점검과 관리를 통해 지켜져야 한다.

 

 


 

#성수대교 # 붕괴 #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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