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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家의 사람들]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을 보듬는 손길’ 허윤정 재난관리팀장

2019.09.04

[희망家의 사람들]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을 보듬는 손길’ 허윤정 재난관리팀장

 

 

 

 

"그런 건 나는 모르겠고.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사그라질 기색이 없다. 말이 더해질수록 표현의 수위도 높아만 간다. 당황할 만도 하지만, 응대하는 쪽은 오히려 침착하다.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이하 희망브리지)에서 성금 배분을 담당하는 허윤정(41) 재난관리팀장에겐 이런 전화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선생님, 황망하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양해 부탁드려요. 저희 협회에선 인명과 주택 피해 위주로 돕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상공인 피해 지원은 추후 이사회를 통해서……”

 

고집을 부리는 이재민을 야속해하거나 원망할 겨를 따윈 없다. 허 팀장을 부르는 전화는 끊이질 않는다. 가끔 “잘 받았다”는 감사 인사도 있지만, 전화를 주는 이들은 대부분 불만이 많다. “우리 집 창고도 피해를 입어 큰 손실을 봤는데, 나는 왜 안주냐”부터 “옆집은 작은 집이고 내 집은 2층짜리 큰 집인데 똑같이 지원하는 이유가 뭐냐”까지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불시에 재난 피해자가 되어버린 이들의 아픔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성금 지원에도 원칙과 철학이 있다. 허윤정 팀장이 “선생님, 양해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달고 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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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양해를 부탁드리는 허윤정(사진) 팀장

 

 

 

 

모금‧배분 업무만 16년, 재난구호의 역사와 함께 한 삶

 

 

 

허윤정 팀장은 가치 중심적인 삶을 지향한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사회복지 동아리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비영리 분야에 관심도 많았다. 졸업 후 전공(경영학과)을 살려 일반기업에서 근무했지만 금세 제동이 걸렸다. 사회적으로 조금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천성(天性) 때문이었다.

 

그 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희망브리지’였다. 2003년 4월에 입사했는데, 마침 대구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지 두 달째 되던 시기였다. 자연스레 피해 성금에 대한 모금‧배분 업무에 투입됐고, 그 일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에 역대급 피해를 발생시킨 태풍 ‘매미(모금 담당)’부터, 올해 초 발생했던 ‘강원 산불(배분담당)’까지 굵직한 재난·재해의 모금‧배분이 모두 그녀의 손을 거친 셈이다.

 

재난구호 일선에서 많은 시간을 바치는 동안, 그녀와 재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2010년 11월 연평도에 포격사건이 났을 때 결혼했고, 올해 강원 산불이 발생했을 땐 이사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삶처럼 국내 재난구호史도 그 사이 큰 변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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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대소사를 모두 재난과 함께 한 허윤정 팀장, 현재 희망브리지에서 허 팀장보다 오래 일한 사람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자연재해와 사회재난이 명확히 분리됐다는 것이다. 자연재해 피해를 돕기 위한 모금은 ‘의연금’이라 불리며 지원 기준도 법령으로 명시하고 있다. 사망피해는 최대 1천만 원, 주택 전파는 최대 500만 원, 침수는 최대 100만 원을 지원할 수 있다. 또한 이 경우엔 법정구호단체인 희망브리지가 배분의 권한을 일임한다.

 

반면 인적요인으로 발생하는 사회재난은 의연금이 아닌 ‘성금’으로 분류되며, 배분에 대한 법정 기준도 명확치 않다. 모금하는 기관에서 자체적으로 이사회를 구성해 배분할 수 있는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허 팀장은 “2016년 대구 서문시장 화재 때는 모금액을 피해자 수로 정확히 나눠 드렸고, 이듬해 여수 수산시장 화재 때는 시장 리모델링에 사용했다”면서 “이는 모두 당시 피해 상인들의 요청과 협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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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강원 산불 당시 현지에 차려진 희망브리지의 성금 접수처. 강원 산불은 사회재난이기 때문에 의연금이 아닌 성금으로 분류된다.

 

 

 

두 번째는 변화는 배분의 주체다. 예전에는 재난 피해지역의 시‧도에서 피해 상황을 조사해주면, 모금을 진행했던 희망브리지에서 그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산출해 해당 시‧도로 전달했다. 지원금의 배분이 피해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이뤄졌던 셈이다. 배분전산시스템이 구축된 2009년부터는 재난지역 지자체의 피해 조사를 토대로, 희망브리지에서 이재민들에게 직접 전달한다. 이는 배분의 투명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달라진 풍경. 허 팀장은 “모금 기관이 직접 지원하면 지속가능한 모금을 위해 보다 책임감을 가지게 되고, 훨씬 투명한 배분이 이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허 팀장이 민원에 시달리는 이유는 이렇게 바뀐 정책들 때문이다. 사회재난은 법적인 배분 기준이 없다보니 피해자 입장에서 볼멘소리가 나올 여지가 생기고, 여기에 직접 배분까지 하니 모든 화살이 허 팀장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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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투성이라도 괜찮아” 설맞이 밥퍼 급식봉사에 참여했던 허윤정 팀장

 

 

 

 

공정하고 깨끗한 배분을 위한 두 가지 퍼즐

 

 

 

재난 피해자에 대해서는 정부도 재난지원금을 지급한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사각지대가 생기니, 민간에서 정부의 역할을 돕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간기관의 지원금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갑작스레 피해를 당한 이재민들을 안타까워하는 국민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것. 성금이 보다 공정하고 투명하게 나눠져야 하는 이유다.

 

희망브리지에서는 모금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언론사 및 시민단체 대표 22명이 참가하는 배분위원회(사회재난은 ‘이사회’)를 통해 배분에 대한 의결을 진행한다. 자연재해는 재해구호법에 명기된 근거에 의해, 사회재난은 ‘지역 간 차등 없는 배분’, ‘피해 유형에 따른 균등 배분’, ‘인명피해 및 주택피해 우선’ 등의 원칙에 의해 대상과 액수가 확정되는 것이다.

 

허윤정 팀장은 배분의 토대가 되는 피해조사의 문제를 지적한다. 재난 피해지역을 가장 먼저 돌아보고, 피해 상황을 조사하는 지자체 담당자들의 업무 과부하와 경험에 대한 우려다.
 

“지역에서 재해가 발생하면 담당 공무원은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요. 며칠 밤을 새야 할 정도죠. 돈이 오가는 문제니 나중에 책임도 따를 수 있고요. 화가 난 이재민 민원도 모두 담당자 몫이죠. 공무원들이 재난구호업무를 기피하는 이유에요. 이런 연유로 업무 연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실제로 희망브리지에서 지자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지자체의 재난구호 담당자 중 업무 경력이 6개월 미만인 비율은 41%에 달했고, 2년 이상은 14%에 불과했다. 전문성이 떨어지고,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들의 역할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장 조사가 치밀하지 않아 지원 대상자가 허투루 정해지면 배분은 불공정해지고, 이재민들은 불만이 생기며, 배분기관은 불신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허 팀장은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더라도 리더 및 담당자의 역량에 따라 똘똘 뭉쳐서 모범적으로 해결하는 지자체가 있는 반면, 몇 백 명의 이재민에도 혼선을 빚으며 문제를 일으키는 지자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지자체 별 행정력의 차이가 구호활동에 영향을 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재민들에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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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응급구호키트 제작을 돕고 있는 허윤정 팀장

 

 

 

 

형평성 있는 배분을 위한 마지막 퍼즐은 바로 ‘기부자의 공정함’이다. 기부에 앞서 수혜 지역이나 지원 대상을 특정하는, 이른 바 ‘지정기부’를 원하는 기부자가 은근히 많다는 것.

 

“서울, 경기, 강원 지역에 한꺼번에 홍수 피해가 났다고 가정해볼게요. 이 경우 강원도에 연고가 있으니 강원도에 기부하고 싶다고 하는 기부자가 있어요. 저희는 지역 균등 배분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죠. 한번 원칙을 무너뜨리기 시작하면, 이후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되니까요.”

 

사실 사회복지 분야에선 지정기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자연재해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누구라도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평하지 못한 지원을 전제로 하는 지정기부는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대기업들이 대부분 특정 지역을 연고로 한고 있다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공적 부조의 성격이 강한 의연금이 지정기부를 지양하는 이유다.(사회재난으로 인한 ‘성금’의 경우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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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브리지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허윤정 팀장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재난이 모두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순간에도 허윤정 팀장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2017년의 포항 지진이나 이듬해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성금 배분이 완료되지 않았다. 허 팀장은 “세월호 건은 지금도 지원 파일을 열 때마다 울컥한다”고 했다. 허윤정 팀장은 자신을 통해 그들의 아픔과 상처가 조금이나마 달래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기부자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때로는 이재민에게 험한 소리를 듣는 이중고 속에서도 이 일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이유다.  

 

 

 

#희망브리지 # 성금배분 # 재난관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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