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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희망브리지 스토리] 산골짝 등대지기를 만나다 - 이기문 함양 재해구호물류센터장
등록일 2019-01-04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소임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등대지기’처럼 말이다. 우린 아직도 2011년 우면산 산사태, 2014년 세월호 사고, 2017년 포항 지진, 2018년 태풍 콩레이 피해 같은 대규모 재난·재해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고통 받을 피해자들을 위해 한 땀 한 땀 구호품을 준비하고, 이를 재난현장으로 신속히 전달하기 위해 밤을 꼬박 지새웠을 ‘누군가’는 잘 알지 못한다.

 

2019년 새해를 맞아, 전국 108개 시·도·군의 구호물품을 도맡아 제작·관리하며 국내 구호체계의 등대지기 역할을 했던 이기문(45) 함양 재해구호물류센터장(이하 센터장)을 직접 만나봤다. 지난 14년 간 농구장 12개 넓이의 물류센터를 지켜왔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아래는 전부 내 구역” 이기문(사진) 센터장(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남부 지사장 직무대행)

 

“많이 춥죠? 아무래도 산자락이라, 바람이 꽤 찹니다.”

 

2018년 12월 17일 오후, 영하의 칼바람이 부는 날씨에 찾아간 함양 재해구호물류센터(경남 함양군, 이하 함양 센터). 이기문 센터장은 구호품 정리에 한창이었다.

 

“여기 이건 무주로 보내야 할 것들이고, 이건 진안으로 가죠. 지자체의 창고는 이곳처럼 크지 않아서 딱 필요한 만큼만 보관할 수 있어요. 비축해둔 구호물품들을 소진하면 여기서 바로바로 보내줘야 하고요.”

 

겹겹이 쌓아올린 물품 내역을 설명하는 중에도 이 센터장의 휴대폰은 쉴 세 없이 울린다. “네, 오전에 이미 보냈어요.” “그 건은 일단 메일부터 확인해 주세요.” 같은 답변들이 이어진다. 이 센터장은 “연말연시가 각 지자체들이 맡겨둔 구호품의 수량 확인이 특히 많은 시기”라고 설명했다.

 

이때 작업 중인 물류센터 앞으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 문에는 ‘함양군청’ 로고가 붙어있다.

 

“안녕하세요. 함양군청에 나온 김태곤이라고 합니다. 저희 군에서 맡긴 구호물품을 파악하러 왔어요. 제가 이 업무를 새로 전담하게 돼서요. 일단 응급구호세트랑 취사구호세트 먼저 볼 수 있을까요?”

 



1500평(5000m²)규모의 물품창고(왼쪽)와 물류작업 중인 이기문 센터장

 

 

│ 구호체계의 심장이자, 손발이 되다

 

사람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혈액 순환이다. 피가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잘 돌아야 건강을 잃지 않는다. 이를 뿌려주는 심장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함양 센터는 구호체계의 심장이라 부를 만하다.

 

지난 2004년 5월 완공한 함양 센터는 충청·경상·전라·제주 지역의 재해구호 활동을 위한 구호품을 관리하는 곳이다. 지난해 9월 기준, 임시주거용 조립주택 42동, 지방자치단체의 위탁용품 3만7천117점, 협회용 응급구호품 3천709점, 의연품 5만394점 등을 보관하고 있다. 단순히 보관만 하는 게 아니다. 구호물품이 부족하면 지자체의 의뢰를 받아 직접 제작하고, 재해가 발생하면 구호현장에 신속하게 뿌려준다.

 

이기문 센터장은 함양 센터의 살아있는 역사다. 완공 무렵 투입돼 무려 14년이나 창고를 지켰다. 그중 10년은 ‘나 홀로 창고에’를 찍었다. 이 센터장은 “나도 이 커다란 센터에서 혼자 이토록 오래 일하게 될지는 몰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완공 후 4년째부터 혼자였고, 지난해 가을 무렵 십 년 만에 신입 직원을 맞았다고 한다.

 

센터의 하루는 그야말로 그 때 그 때 다르다.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지자체 위탁계약 건. 현재 108개의 시·도·군의 구호물품을 4만점 가까이 관리하고 있는 만큼, 그 물량에 대한 수요조사·제작·보관·배송 등의 업무가 뒤따른다.

 

“행정안전부에서 매년 각 시··군의 구호물품 비축 기준을 정해줘요. 통상 일 년에 재난·재해가 이정도 발생하니까, 이 만큼의 구호품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 수요를 조사하고, 모자라는 만큼 우리가 제작을 합니다. 그걸 가지고 있다가, 지자체 창고에 보충해주거나 재해 현장에 직접 전달하는 거죠.”(이기문 센터장)


나라가 정한 긴급구호품 외에 기업 등에서 기부하는 물품들을 받고, 이를 분류해 놓는 것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기업은 선의로 하는 것이겠지만, 실상 재해 현장과 동떨어진 물품이거나 상태가 불량해 이재민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들도 꽤 많다고 한다. 이를 분별하고, 보관해 두는 것은 ‘꼭 필요한 순간’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 밖에도 희망브리지의 봉사활동을 위한 봉사단을 관리한다거나, 지자체의 각종 민원과 요구사항을 해결하는 것도 센터의 몫이다.

 


함양 센터에서 보관 중인 임시주거용 조립주택

 

갑작스런 대형 재해가 발생하는 경우엔 상황이 급변한다. 피해 현장을 예의주시하면서, 필요한 구호품의 종류와 수량을 재빨리 파악하고, 차량수배와 배송업무까지 한 달음에 이뤄져야 한다. 이 센터장은 지난 2011년 서울 인근 지역의 태풍 무이파 피해와 우면산 산사태 등 집중호우 피해의 예를 들었다.

 

“정말 최악의 사고였어요. 희망브리지는 파주와 함양, 두 곳의 물류센터를 운영하는데 두 곳의 구호품이 거의 다 빠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죠. 밤새도록 센터에 트럭이 들락날락거렸어요. 작업자들이 더 이상 못하겠다고 아우성 칠 정도였죠. 당시 우리 센터에서 전달한 구호품만 15만 점이 넘습니다.”(이기문 센터장)


창고지기라고, 무조건 물류센터만 지키란 법은 없다. 재해 현장의 구호활동이 길어질 경우 현장 최일선에서 손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사고 때는 세탁구호활동을 위해 한 달 넘게 팽목항 현장에 기거했다고 한다. 이 센터장은 “현장에 주둔하며 이재민들의 즉각적인 수요를 파악하고, 뜻있는 기업들과 지원 여부를 논의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태풍 콩레이의 피해를 입은 영덕 강구시장 풍경. 함양 센터에선 이 현장에 응급구호 세트 500개와 모포 960장, 수건 1,200장, 화장지 2,400개, 생수 1,536병 등을 우선 지원했고, 세탁기와 건조기가 3대씩 장착된 세탁구호차량 2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사명감이 만든 습관 ‘여름 금주령’

 

 

이기문 센터장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구호 업무로 뛰어 들었다. 이 일을 하기 전까진 영업도 하고, 개인사업체도 차려보는 등 다양한 일에 도전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함양에 터를 잡은 인연으로 시작한 센터 업무지만, 이후엔 곁눈질 없이 달려왔다. 사원으로 시작해 주임, 대리를 거쳐 과장까지 됐다. 현재는 비록 대행이지만 희망브리지 남부지사의 지사장 역할도 겸업 중이다.

 

 

그간 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성스레 구호품을 전달했는데 ‘물건이 시원찮다’거나 ‘일을 그딴 식으로 밖에 못 하냐’며 오히려 욕을 먹는 경우도 있었고, 기업 기부물품이 곰팡이로 얼룩져 손수 폐기처분 했던 쓰라린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기나긴 시간이었던 걸 감안하면 의외로 순탄하게 해 온 것 같다고 자평한다. 그 과정에서 구호체계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사명감은 조금씩 축적됐다. 이 센터장은 “사고가 마무리되고, 이재민들이 ‘감사했다’는 전화를 할 때도 있는데, 그 때 보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오랫동안 일하면서 일종의 ‘직업병’도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상예보를 체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태풍 같은 거라도 접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며칠 동안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진단다. 술을 즐기는 편이지만, 집중호우 기간이나 태풍이 잦은 시기엔 자체 금주령을 내리기도 한다.

 


“여름에는 술을 끊는다”는 이기문 센터장

 

강산이 ‘한 번 반’ 변하는 시간 동안 물류센터를 책임져 온 이 센터장은 “재해구호 현장에도 트렌드가 있다”고 말한다. 대형 재해 현장에 시민단체의 ‘밥차’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취사구호센터의 수요가 적어지는 것이 대표적이다.


“소득 수준이 많이 높아졌잖아요. 눈높이도 자연스럽게 올라가죠. 예전에는 그저 ‘주는 것’ 자체에 감사해 했다면, 지금은 구호품의 질적인 부분도 많이 따져요.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긴급구호세트의 포장이 계속 바뀐 것도 그래서죠. 이재민들을 보살피는 게 우리 역할인 만큼, 더 신경 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이기문 센터장)

 

때론 치밀해야하고, 때론 치열해야하는 물류센터 창고지기로서의 14년. 공교롭게도 정년퇴임까지 남은 시간도 딱 그쯤이다. “15년 후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 것 같냐”는 물음에 “여전히 센터 지키고 있겠죠 뭐.”라고 담백하게 답하는 이 센터장. 그 묵묵한 바람이 등대지기의 그것과 참 많이 닮아 있다.

 


어스름 해질 무렵, 함양 재해구호물류센터 사무실

/사진: 더퍼스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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